자매들의 수다
세 여자가 배낭을 짊어졌다. 남들의 눈에는 친구 사이로 보이겠지만 우리는 자매지간이다.
육십을 훌쩍 넘긴 언니와 환갑을 앞두고 있는 나, 나보다 두 살 아래인 동생. 젊지 않은 여인들의 마음이 봄바람에 두둥실 부풀어 올라 일상 탈출을 결행했다.
오월의 신록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화개 골짜기에 발을 들여놓자 녹차 향기가 사람보다 먼저 우리를 반긴다. 녹차 밭으로 덮힌 산과 산 사이 낮은 곳을 흐르는 물속에도 녹색 빛이 잠겼다. 이맘때쯤 어느 집이건 녹차 인심이 후한 멋도 화개골짜기만의 매력이다. 머무는 집마다 얻어 마신 차 덕분에 피곤함을 잊는다. 산뜻한 산바람과 계곡에서 올라오는 청량한 물바람이 가슴으로 안겨온다. 도시의 복잡한 생각들은 저 아래 섬진강 속으로 출행랑을 친다.
' 관향다원'에 배낭을 풀었다. 멋있는 사람만이 산속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소견대로 그곳의 주인은 멋이 온 몸에 배어 있다.
무슨 복으로 지리산 한 자락을 차지하고 있느냐고 내가 물었더니 그는 함박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쑥차.녹차, 대잎차, 솔잎차, 갖가지 챠향기가 집 안에도 집 밖에도 가득가득 고여 있다.
차실 가운데 놓여있는 차 탁자 위에서 난분이 객을 맞는다. 소엽 풍란이 날아오는 듯이 꽃을 피웠다. 난 향기와 함께 차향에 젖어보라는 주인의 배려가 역시 고상하다. 황토벽에 한지를 바르고 그 위에 멋스러운 싯귀와 묵화가 빼곡하다. 나그네들이 끓어 오르는 시정을 적은 것이란다. 어디서 읽은 듯한, 누군가에게서 들은 듯한 느낌을 내 속에 서도 비슷한 시감이 우러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님을 그리워하는 것은
님의 향기가 내 가슴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햇차의 향기와 주인의 몸에 배어있는 산 사람만의 멋과 우람한 산 속에 파묻힌 집의 고즈넉함. 오래도록 가슴속에 묻어두고 싶은 향기이다.
깊은밤이 되어서야 시냇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 누웠다.
철 철 철 흘러가는 물소리 때문에 잠이 들지 않는다. 얼마만에 한 이불속에 발을 모으는 것인지 우리 셋은 감회가 깊다. 어린시절부터 출가하기 전까지 세 자매는 언제나 한 이불 속에서 잠을 잤다. 가랑잎 구르는 것만 보아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시절이 었으니 날마다 수다를 떨다가 웃음이 터지면 이불이 들썩거리고 문밖에까지 깔깔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셋 중 하나씩 이름이 불리워 아버지 앞에 무릅을 끓었다. 조용히 잠을 자겠다고 약속을 드리고 방으로 돌아 와서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또 킥킥거렸다.
동생은 흉내쟁이였다. 옆집 아줌마의 함경도 사투리를 시작으로 교회 목사님의 설교 버릇도 흉을 잡았다. 어느 장노님의 기도 내용은 달달 외워가며 웃겼다. 아버지의 야단치시는 모습도 예외일리가 없었다. 누워 있는 나를 자기 앞에 끓어 앉혀 놓고서 호통을 치는 것이다.
한 밤중에 계집아이들 웃음소리가 담을 넘으니 동네 챙피해서 아침에 어찌 밖을 나가겠느냐 또 까르르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얌전한 언니와 새침데기인 나였지만 동생의 코메디에는 눈물을 훔쳐가며 웃어야 했다.
눈 바람이 씽씽 소리를 내며 지붕을 넘고 문살을 스쳐가도 그 밤이 짧기만 했었다 새벽녘 살포시 어머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교회의 새벽 종소리가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댕댕거린 뒤였다. 눈길을 혜치고 교회로 가신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숙연해져서 웃음을 멈추고 "이제 그만 자자 " 하고 잠을 청하기도 했었다.
어찌 웃음꽃 피는 일만 있었겠는가. 티격태격 싸우는 일도 빈번했다 . 나보다 체격이 크고 성격도 활달한 동생은 언제나 나를 이기려 들었다. 빨래하는 일 .청소하는 일에서 요리 저리 핑계를 대며 뺀질거리는 내가 밉기도 했으리라.
언니는 그런 둘 사이를 넉넉하게 덮어주는 뚜껑이었다. 나를 다독거리며 동생을 어르며 원래부터 맏딸은 그릇이 큰 법인양 남동생들의 짖궂은 말썽까지 다 글어안으며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런 언니에게 나는 :천사표"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렇게 품고 저렇게 덮어주던 언니의 품은 어머니 품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는 최근에도 날마다 전화 수다를 떤다. 삶이 고단하다고 울먹일 때도 있고 경사가 있다고 하하거리기도 한다. 슬프고 아픈 일들은 나누어지고,기쁘고 행복한 일들은 함께 누린다. 물론 옛날의 한 이뿔속 추억을 곱씹은 것은 빼놓을 수 없은 지정곡이�. 오늘 무엇을 할 것이며 밥 때에 밥은 먹었느냐는 물음도 잊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의 수다는 옛일을 회상하며 오늘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매의 생활을 이어주는 가교이다.
창 아래에서 들리는 시냇물 소리는 여전히 바쁘기만 하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어디로 그렇게도 빨리 가야만 하는지.....내일은 지리산 노고단에 오를 예정이다. 나이살이 육중해진 몸으로 배낭을 지고 산을 오르려면 오늘 푹 쉬어야 한다. 옆으리 언니와 동생도 돌아눕는다.
잠을 청하는 모양이다.
천군만마 같은 두 사람을 양 옆으로 가운데 누운 내가 왠지 복이 많다는 생각이다. 밑에서 받쳐주고 위에서 덮어주니 나는 장이 가득 담긴 항아리처럼 비 맞을 일이 없고 물 젖을 일이 없지 않은가.
2년 전에 내가 시신경 염증이라는 병으로 입원을 했을 때 언니와 동생은 금식 기도를 작정하며 완쾌를 기원했다. 실명 위기에 있었던 그 병세도 자매들이 기도에 감복하여 내 몸에서 떠나 버렸다.
처마 끝에 매달리 풍경 소리가 가늘게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하룻밤쯤 설친다 해도 저 풍경소리가 내일 아침 거뜬히 나를 일으켜 세울 것 같다. 이번 여행 덕분에 우리의 수다거리가 더 풍성해질 것을 생각하니 잎이 벙긋해진다. 돌아눕는 귓가에 새벽 닭 우는 소리가 정겹다.
.......지리산 관향다원에서 이모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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